가수 최희준이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한 달이 넘었다.

그를 추모하면서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본다.



최희준은 우리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1960년에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데뷔해 '하숙생', '종점', '팔도강산', '길 잃은 철새 '등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약 60년 간 가요계의 거목으로 자리했던 가수였다.

 

                                  인생을 노래한 최희준(崔喜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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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노래하며 1960년대를 풍미한 톱 가수 최희준은 당대 드문 엘리트 출신이면서도 서민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서울대 법대출신 가수인데다가 연예인으로는 드물게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199615)으로 의정활동을 펼치면서 가수 출신 정치인 1라는 수식어까지 달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소박하고 친근한 가수였다. 특유의 소탈한 웃음 덕분이다.

 

본명이 최성준인 그는 작곡가 손석우씨가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며 이름에 기쁠 희자를 넣어 희준(喜準)’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최희준은 실제 웃는 모습이 매우 천진하게 느껴지는 소시민적인 캐릭터로 인기를 누렸고, 개명 절차를 마쳐 최희준이 법적 본명이 됐다.

 

최희준은 영원한 하숙생으로도 불린다. 그를 스타 반열에 올린 노래가 하숙생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군방송 ‘AFKN’을 즐겨 들으며 최신 팝송을 외우다시피 했을 정도로 음악에 빠진 그는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직업가수로 노래를 시작했다. 서울대 재학시절 장기놀이대회에 법대 대표로 나가 노래를 부른 것이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될 줄이야. 그 후 음악 애호가들과 어울리다보니 사법고시에 한 차례 고배를 마셨고, 결국 주위의 권유로 미8군 무대에 서게 된다.

 

최희준은 1960년 손석우 작사 작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취입하면서 프로로 데뷔했다. 이 곡이 1961년 들어 크게 히트하자 최희준은 이름을 크게 떨친다. 게다가 1965KBS 라디오 일일 드라마 하숙생의 주제가를 불러 스타 덤에 올랐다.

 

하숙생은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큰 인기를 누렸고, 2001하숙생노래비가 시나리오 작가 김석야의 고향인 천안 삼거리공원에 세워졌다. 특히 그가 주제가를 부른 맨발의 청춘1966년 당대 최고의 은막스타 신성일과 김지미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https://youtu.be/WktYRl9WpSY (클릭해 놓고 들으면서 아래글 읽기)


인기 연예인으로서 그는 군복무도 솔선수범했다. 해병대로 자원입대해 모병 선전과 전국 위문공연에 앞장섰다. 1974을 발표한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안양 동안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한국문예진흥원 상임감사, 한국대중음악연구소 소장을 지낸 바 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스캔들이 전혀 없던 가수로 알려진 그는 두고두고 후배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노래 <하숙생>의 주인공 최희준(본명 : 최성준. 1936년생)824일 그의 노랫말처럼 인생의 나그네길을 접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가요 100년사에서 국회의원(15)을 지낸 가수는 최희준이 유일하다. 우리 가요사는 크게 구한말과 일제 강정기를 거쳐 1945년 광복까지를 1, 광복이후 6.25한국전쟁을 거쳐 자유당 말까지를 2,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를 3기로 나눈다. 3기에 해당하는 현재 대중음악 흐름의 시작을 1960년대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최희준이다. 그는 미8군 무대에서 일반무대(지금으로는 방송계로 간주됨)로 전환한 대표적인 가수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1960년대 우리 가요는 커다란 변혁을 맞았다. 19557266.25한국전쟁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사령부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국연예인으로 구성된 미8군쇼 단체가 발족하였으며, 한창 때인 1950년대 중반에 미군클럽이 264개가 될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미군측이 미8군쇼 단체에 지불했던 금액이 연간 120만 달러에 육박했는데 당시 한국 정부의 수출액이 100만 달러 내외였음을 유추해 볼 때 엄청난 외화벌이였다.

 

그즈음 경복고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1954년 입학)에 재학 중이던 최희준은 친구의 권유로 1959년 제1회 서울대 장기자랑 대회에 나가 팻분의 <I'll Be Home>과 이브 몽땅의 <고엽>을 불러 1등을 했다. 이게 계기가 돼 미8군 무대에서 잘나가던 파피 악단의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음악활동을 펼치기에 이른다.(당시 일반무대보다 8군무대가 수입이 더 좋았다고 한다)

 

그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KBS경음악단장이던 손석우는 김해송이 이끈 KPK악단에서 기타주자로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기타를 다룬 인물로 송민도에게 <눈물의 왈츠>란 곡을 줘 취입시켜 화제를 모았는데 번안곡 1호인 이 노래는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을 번안한 곡이다.

 

손석우는 방송국측으로부터 왜색가요를 배제한 밝고 건전하고 품위있는 가요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만든 곡이 1961년 나온 최희준의 <우리 애인을 올드미스>와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로 기존에 왜색풍이 아닌 팝 취향의 새로운 가요로 기존 우리 가요의 패턴을 바꾼 계기가 됐으며 이 두곡은 당시 동남아까지 번져 나갔다.

 

최희준은 솔로로 활동하면서 요즘 말로 조인트 그룹 활동을 병행한다. 당시는 미국의 에임스 브라더스와 브라더스 포를 흉내낸 중창단이 유행하던 시절로 블루벨즈, 봉봉4중창단, 자니 브라더스, 멜로톤4중창단 등이 나와 인기를 끌던 시절, 같이 활동하던 8군 무대 가수로 <부모>(1968)의 유주용, <저녁 한때의 목장풍경>(1965)의 위키리, <첫사랑 언덕>(1967)의 박형준 등과 어울려 4클러버스란 팀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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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희준, 한명숙, 유주용,

            박재란, 현미, 윤복희, 이금희   (70년대 초반에 촬영)

 

이처럼 그의 줏가가 계속 오르면서 이봉조와 컴비를 이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의 동명 주제가를 불러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뒤이어 <월급봉투>(1962), <진고개 신사>(1964), <위를 보고 걷자>(1964), <나는 곰이다>(1965), <엄처시하>(1965), <종점>(1966), <하숙생)(1966), <팔도강산>(1967) 등 다른 가수에 비해 드라마나 영화주제가를 많이 불렀는데 최희준이 불러야 히트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최초의 학사가수로 불린다. 서울대를 나온 가수가 나왔으니 당시의 분위로 볼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법대 출신이면 판. 검사는 따 논 당상인데 딴따라 취급을 받던 상황에서 가수라니 화제 거리가 된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의 뒤를 이어 강수향, 한상일(역시 서울대 출신임), 최양숙, 김상희 등 학사가수가 줄을 이었다.

 

그는 별명이 2개 있는데 "한국의 냇킹콜"은 그의 저음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냇킹콜과 닮았다하여 음악평론가 이백천이 붙여준 것으로 1964년 실제로 냇킹콜이 내한했을때 최희준은 지방공연 중 공연을 취소하고 냇킹콜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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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스포츠머리가 위키리, 냇킹콜, 최희준(가운데), 남석훈, 유주용)

 

그의 또 다른 별명으로 "찐빵"이란 사실을 아는지? 코미디언 구봉서가 붙여준 것으로 그의 구수하고 겸손하고 수더분한 모습에서 풍기는 인간미가 정말 찐빵처럼 친근하다.

 

그는 1971년 가수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가수분과위원장을 지냈고 1996년 국회로 진출해 문화관광위 소속으로 '라이브클럽 합법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그동안 라이브클럽에서 1인 이상 연주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이전까지는 가수는 정식 공연장외에서 노래를 부르면 벌금을 냈다)

 

2001년 문예진흥원 상임감사, 2003년 대중음악연구소 소장, 2007년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을 수상한 그는 지금까지 발표한 곡이 240여 곡으로 연륜에 비해 곡수가 적은 편인데 이유가 있다. 즉 아무 곡이나 부르지 않는 고집 때문이다. 당시의 웬만한 가수는 누구나 한, 두곡 트로트를 불렀는데 그는 트로트를 부르지 않았다. 이는 트로트를 멸시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창법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1988년 올바른 블루스 보급을 위해 한참 후배인 신촌블루스의 앨범작업에 참여해 <하숙생>을 블루스로 불렀으며 2002년에는 록밴드 사랑과 평화와 협연을 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등 음악에 관한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이 후배들한테 귀감이 됐다.

 

최희준의 히트곡은 뭐니뭐니 해도 <진고개 신사><하숙생>이다. 여기에는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가창력과 페이소스가 발표한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만인의 가슴을 울린다.

 

고 최희준 씨의 아버지는 그가 장차 법조인이 되길 희망했는데 아들이 노래로 빠져 많이 속상해 하셨다고 했다. 1963년 김현숙과 결혼. 1989년 부인 김현숙이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1991년 두 번 째 아내 스튜어디스 출신의 김비비안나와 재혼.


        ~~먼산에 落葉져 가는 이 계절에 재삼 고인의 冥福을 빈다~~